3-27-2016
563.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을 때”(1)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만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을 때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는 글이 있어 원문을 2회에 걸쳐 올려 드립니다.
[신앙생활과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교회 목사는 목자들에게 목양을 위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위임이고 어디까지가 방치인지 경계선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목자들도 비슷한 갈등을 맛봅니다. VIP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임감과 섬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알지만, 어느 정도로 강하게 권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습니다. 계속 일방적으로 섬겨 주면 영적인 어린이로 머물게 된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삶 공부를 수강하라든가 교회 사역을 하라고 강권하면 압박감을 느껴서 잠수를 타거나 목장을 떠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와 같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럴 때 엉거주춤하게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으면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정체에 빠지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을 때에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쪽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갖 영접한 사람의 경우에는, 압박감을 느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최대한 부드럽게 삶 공부 수강과 주일 예배 참석을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 영혼구원해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쪽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 하다 보면 잠잠히, 묵묵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때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핑계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는, 게으름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어차피 꾸중을 들을 것이면 하나님을 너무 신뢰했다고 꾸중을 들어야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고 꾸중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과업을 시작할 때에도 비슷한 갈등을 맛봅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모하기 때문인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정해진 기간 동안 기도해 보고 그래도 확신이 안 서면, 안 하는 쪽 보다는 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무모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초청하고 계신데 불순종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최영기,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을 때,” 국가사원 원장코너 145번. 다음 주에 계속).